을미사변은 1895년 일본이 조선 궁중에 일본 낭일들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한 만행이었습니다. 을미사변의 배경, 전개, 영향 등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을미사변의 배경
1. 조선에서 열강의 각축전
1894년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했고, 러시아와 중국 등 다른 열강들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조선 정부는 이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2. 고종의 친러정책, 친일파의 입장
고종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친러정책을 추진하며 자주성 확보를 시도했다.
이에 반대하는 친일파 세력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친일내각 수립을 계획했다.
친일파는 고종의 친러정책이 조선의 자주성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개입을 요구했다.
3. 일본의 한반도 지배 야욕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친일파와 공모하여 친일내각 수립을 계획했고, 이를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은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한 일련의 음모였다.
이처럼 을미사변의 배경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 고종의 친러정책에 대한 친일파의 반발, 그리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 야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을미사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전개
1. 명성황후 시해
일본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20일) 조선 궁중에 일본 낭인들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궁녀와 신하들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어 친일 세력인 박영효, 김홍집 등이 새로운 정권을 구성하였다.
2. 민중의 저항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분노하였지만, 일본의 압박 아래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친일정권 수립에 분노한 민중들이 을미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섰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경기도 이천의 박준영, 춘천의 이소응, 제천의 유인석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면서 지방의 친일관료들을 처단하였으며, 군사시설을 파괴하였다.
3. 아관파천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간 머문 것은 국가체면에 손상을 주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약 8년간은 국가가 상대적으로 자주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한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을미사변의 영향
1. 의병운동과 반일정서
국모시해 만행과 일련의 급진적 제도개혁은 일반 국민들의 큰 반발을 샀다. 의병운동과 반일정서가 팽배하였다.
2. 제도 환원 및 독립문
친일내각이 시행한 새로운 제도의 일부를 옛날로 되돌려 놓았다. 지방행정구역의 13도 환원 등을 실시하고 자주독립의 상징물로서 독립문을 세웠다.
3. 광무 연호 사용
1897년 8월 16일 연호를 광무라고 고쳐 부국강변의 기치를 내세우고, 이 해 10월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제천단인 환구단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었다.
4. 광무개혁
대한제국은 일차적으로 황제권강화를 통하여 국가주권을 수호하고, 황제권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주체적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했다. 대외적으로 자주독립을 강화하고, 안으로 소민 위주의 민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고종황제가 추진한 개혁을 '광무개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론
을미사변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 고종의 친러정책에 반대하는 친일파의 움직임, 그리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 야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친일 정권 수립에 분노한 민중들의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일시적인 자주성 확보가 가능했다. 또한 을미사변 이후 광무개혁을 통해 황제권 강화와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결국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강해져 갔고, 이는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는 길로 이어졌다. 을미사변은 조선 말기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