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세운 국가로, 독립적인 정체성을 지키며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고구려의 유산을 이어받아 성장했지만, 점차 독자적인 정치 체계와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발해의 건국과 발전, 전성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발해의 건국
1. 대조영의 초기 활동
대조영은 고구려의 옛 장수로,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의해 요서 지방의 영주로 강제로 옮겨졌습니다.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 도시로,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 해족, 말갈족 등이 거주하였습니다. 대조영은 이곳에서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반당나라 활동을 펼쳤습니다.
2. 천문령 전투와 발해 건국
696년, 거란족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반당나라 전쟁이 일어났고,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요동 지역에서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걸걸중상이 사망한 후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동모산으로 이동하여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건국 연도는 698년으로, 초기 국호는 진국이었습니다.
3. 발해의 외교 활동
발해 건국 후, 대조영은 곧바로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발해는 이를 이용해 신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당나라는 발해를 포섭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대조영을 위로하고, 대조영은 아들 대문예를 당나라로 보내 머물게 하였습니다.
4.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
713년, 당 현종은 대조영을 발해 군왕으로 책봉하면서 발해와 당나라 간의 국교가 정식으로 맺어졌습니다. 발해는 점차 진국 대신 발해를 국명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당나라와 조공 및 책봉 관계를 맺었지만, 당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조영은 독립 국가로서 발해를 유지하였고, 그의 장자인 대무예 역시 발해의 독립성을 지켜나갔습니다
발해의 발전
1. 발해의 초기 성장
발해 건국 후,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빠르게 결집하여 발해는 초기에 10여만 호에 이르는 인구와 수만 명의 정예병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대조영은 국제 정세를 잘 이용하여 주변 말갈 세력의 대외 활동을 통제하고, 왕권을 안정시켜 나갔습니다. 발해는 독립 국가로서 빠르게 성장하며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 무왕 대무예의 영토 확장
무왕 대무예(재위 719∼737)는 발해의 제2대 왕으로, 영토 확장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무왕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였습니다. 그는 부여, 옥저, 조선 등 여러 나라를 얻으며 발해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732년 무왕은 장문휴를 보내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였으며, 돌궐 및 거란과 연합하여 하북 지방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펼쳤습니다.
2. 문왕 대흠무의 체제 안정
무왕의 뒤를 이은 제3대 문왕 대흠무(재위 737∼793)는 영토 확장보다는 내부 체제의 안정과 문화 발전에 집중하였습니다. 문왕은 즉위 직후 당나라로부터 국가 의례를 정한 책과 역사서를 수입하며 유학과 불교를 발전시켰습니다. 중앙 행정 기구와 중앙 군대, 관리의 등급 제도와 복장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계를 완비하였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당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고, 신라와의 교류를 강화하며 국제적인 입지를 넓혔습니다.
3. 문왕의 황제국 체제 구축
문왕은 56년의 장기 집권을 통해 왕권을 안정적으로 강화하고 황제국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황상과 황후 칭호를 사용하는 등 황제와 관련한 용어를 사용하며 발해를 황제국으로 자처하였습니다. 771년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이 천손임을 자처하였습니다. 문왕의 장기 집권과 황제국 체제 구축은 발해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전성기
1. 선왕 대인수의 대외 확장
1) 발해의 제10대 선왕 대인수(재위 818∼830)는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의 4세손으로, 그가 즉위하면서 발해의 왕계가 바뀌었습니다. 선왕은 연호를 건흥으로 삼고, 문왕 사후의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을 이루었습니다.
2) 그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월희말갈 등을 완전히 복속시켰습니다. 서남쪽으로는 요동 지방,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로써 발해의 경계는 사방 5,000리에 이르렀으며, 5경 15부 62주가 완비되었습니다.
3) 선왕 대에는 당나라와 일본에 다섯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며 대외 관계를 안정시켰습니다.
2. 발해의 황제국 체제
선왕 이후 발해는 융성기를 맞이하며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발해는 9세기 말 신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가지며, 일본과의 경제 및 문화 외교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발해의 황제국 체제는 당나라와 신라의 내분 속에서도 그 위상을 유지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결론
발해의 건국과 발전, 그리고 전성기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맥락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대조영의 지도 아래 형성된 발해는 고구려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독립적인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무왕과 문왕, 선왕의 통치 아래에서 발해는 영토를 확장하고 문화와 체제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특히 선왕 시기에는 국제적 위상을 높이며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발해의 독립성과 문화적 성취는 오늘날에도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